쓸데없이 길어져서 블로그로 옮김. 미리보기 스포방지를 위해 이미지 한 장 올려놓습니다.
FF15 본편을 플레이하기 전 내가 처음 FF15를 제대로 접한 매체는 킹스글레이브였다. 관람했을 당시의 인상은, 10년간 몇 번이나 고쳐지고 엎어진 방대한 세계관 설정의 파편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사전지식이라고는 없이 녹티스와 루나라는 이름과, 녹티스가 왕자라는 정보만 접하고 들어간 상태에서 러닝타임 내내 모르는 세계에서 모르는 인물들이 알 수 없는 단어로 대화하고 전쟁하는 걸 보며 물음표만 찍고 나왔던 기억이다. 본편을 플레이하고 브라더후드를 시청한 지금 다시 보면 감상이 다르겠지만...
주인공이 희생해서 세계를 멸망에서 구한다는 서사는 드물지도 않다. 이미 10년 전 비슷한 주제의 게임이 같은 시장에서 히트를 친 사례가 있고, 희생양이라는 소재는 이미 성경에서부터 반복되어 온 클리셰 중의 클리셰이다. 더욱이 FF15의 주인공 녹티스는 그나마 평범한 인간이었다가 세계의 운명을 짊어지는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왕이 될 운명으로 태어났다는 점에서 더욱 왕도의 길을 걷는다. 2016년에 발매되는 게임 치고는 조금 진부할지도 모르나 어떻게 생각하면 JRPG의 미덕이기도 하다. 세계를 구할 고귀한 인물이 모험을 떠나 동료와 유대를 나누고 크리스탈의 힘을 빌어 악한 적을 처단하는 서사는 올드 FF 시리즈의 전통이며, 고급 승용차를 타고 스퀘어에닉스의 세련된 기술력으로 구현된 도로를 누비며 새로운 방식으로 즐기는 FF라는 데에서 시리즈 팬들은 깊은 감명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타바타 디렉터는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것일까? 본래의 파이널 판타지 13 베르서스에서 어떤 요소를 그대로 가져왔는지, 어떤 부분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알 수 있는 길은 없다. FF15의 테마는 <별을 구하는 왕>의 이야기이다. 고귀한 혈통을 지닌 주인공은, 피앙세와의 행복한 결혼을 위해 여행을 떠났다가 죽음이라는 종착점에 다다른다. 중간에는 <점차 멸망을 향해 나아가는> 세계(혹은 별)의 모습이 있어야 할 테다. 그러나 총 14챕터로 구성된 게임에서, 8챕터까지도 전혀 그러한 낌새를 느끼기 힘들다. 복선이라고는 많은 유저들은 눈치채지 못했을,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조금씩 길어지는 밤 정도이다.
여행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루시스는 왕을 잃고 제국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지만, (안 그래도 지극히 제한된) NPC들과의 대화에서 조국의 상황에 대한 불안이나 분노는 느끼기 힘들다. 주인공 일행의 가까운 사람들이 제국의 계략에 죽어나가지만 그들은 밝게 행동한다. 캐릭터들이 마냥 우울과 슬픔에 젖어있어야만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색깔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느릿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BGM, 밝은 햇살 속에서 달리는 레갈리아, 의미를 알기 어렵고 단순반복적인 서브퀘스트 같은 것들이 플레이어가 감정이입할 기회를 빼앗고 슬픔을 희석시킨다. 그리고 다른 대륙으로 건너가자마자 유저를 놀래키기 위해 준비해왔던 반전이라는 듯이 모든 것이 갑작스럽게 진행되며, 앞에서 조금도 암시되지 않았던 설정들을 그제서야 속사포로 풀어놓는다.
FF15가 <세계>의 표현에 실패했다는 증거는 유감스럽게도 더 있다. FF15의 대부분의 모험은 루시스에서 이루어진다. 주인공 일행은 분명 <루시스를 떠나기 위해> 인섬니아를 출발했는데도 그렇다. 오픈 월드는 루시스에만 구현되어 있으며, 테네브라에와 니플하임 제국은 도시 하나 정도의 규모로만 표현되고 오픈 월드가 아닌 일직선 진행이다. 그나마도 제국은 킹스글레이브를 보지 않으면 황제가 어떤 인간인지, 제국이 어떤 곳인지 전혀 짐작도 하기 힘들 정도이다. 신문이나 방송으로 불친절하게 제국민의 절반이 시해화되었다는 짤막한 설명만을 해 주고는 모든 걸 덮어버리고, 니플하임에 들어서면 던전화된 황성과 수상쩍은 연구 시설만이 플레이어를 기다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 일행을 가장 적대하고 위협하는 요소는 전 세계에 닥친 밤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불행이 아닌, 아딘 개인에게 지나치게 집중되어 버린다. 제국은 단순하고 평면적인 악으로 표현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딘에게 연구시설만을 제공하고 빠르게 퇴장하는 맥거핀적인 존재가 된다. 아딘이 긴 세월동안 전세계를 상대로 저질러온 해악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위악적으로 묘사되지만 (심지어 주인공의 약혼자를 살해하기까지 하는데도) 충격을 받거나 이입할 사이도 없이 그 모든 것을 순식간에 해치워버린다.
반전의 묘미도 없다. 그는 대놓고 수상하다는 낌새를 풍기며, 주인공들은 그가 처음 등장할 때부터 그를 경계하고 싫어한다. 제국의 재상이라는 정체는 (킹스글레이브를 본 사람들은 다 알고 있기도 했거니와) 굳이 처음에 숨겼어야 할 이유도 없다.
아딘이 처음에는 조력자로 등장하고, 제국의 재상 신분이지만 실은 루시스의 왕가 출신이라는 점 등은 잘 연출했으면 플레이어에게 꽤 신선한 충격을 줄 수도 있었던 설정이다. 그는 이야기의 최종보스이고 주인공의 대척점으로 설정된 캐릭터이다. 그의 캐릭터성을 죽이면 이야기 전체가 약해진다. 세계를 구하는 데 실패하고 왕으로 선택되지 못한 캐릭터를 잘 표현하는 것은, 반대로 세계를 구하고자 선택된 왕인 주인공의 서사에 더 깊이를 주고 이야기를 탄탄하게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뜬금없는 연출과 갑작스러운 이야기 전개의 와중에 아딘의 캐릭터성은 붕 떠버리고, 기껏 있는 설정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유야무야 묻혀버렸다.
그렇다면 주인공과 동료들은 어떤가? FF15는 기본적으로 녹티스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플레이어는 그의 시점을 따라가면서도 그의 속내를 이해하기 힘들다. 아마 이것은 의도된 연출일 것이다. 계속 묵묵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나아가는 그의 모습을 보여주고, 스탭롤이 끝나고 가장 마지막에 그가 '괴롭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으로써 그의 캐릭터를 완성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그의 내면을 보여주지 않는 대신, 녹티스의 캐릭터성을 표현하기 위해 동료들과의 상호작용을 많이 묘사했는데 이 시도는 나쁘지 않다. 차에 타고 있거나 전투를 하거나 가만히 서 있는 동안 파티원들은 계속 녹티스의 행동에 반응하고 자기들끼리 대화하고 여러 가지 제스처를 선보인다. 다양한 패턴의 잘 구현된 인공지능으로 그들의 버릇, 성격, 행동을 보여주며 정말로 함께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연출도 뒷받침되는 이야기가 없으면 '보여주기'에 그칠 뿐이다. 녹티스는 함께 여행하는 3명의 동료들과 처음부터 비교적 굳건한 신뢰관계로 맺어져 있다. 대부분의 JRPG에 소위 '파티원 수집' 요소가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주인공이 동료가 될 인물들의 신뢰를 얻는 과정을 표현하면서 주인공과 동료의 성격과 관계를 묘사하기에 좋고, 동료가 주인공의 여행에 함께하게 되는 경위를 통해 주인공이 겪는 시련과 모험에 좀더 당위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장점도 포함될 것이다. FF15는 이 과정을 과감히 생략하고 그들이 친해진 경위는 외전 BROTHERHOOD에서 따로 설명하고 있다. 미디어믹스를 고려한 거대 프로젝트라는 특성상, 상업적인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우선 본편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캐릭터성이 충분히 깊이를 가진 이후에 성립한다.
인공지능은 섬세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그런 사소한 행동들은 결국 사소한 측면을 나타내는 데에 그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큰 줄기가 이미 확실히 잡혀 있으면 섬세한 요소들이 큰 장점이 되었을 것이지만, 글라디올러스의 중간 일탈이나 프롬프토가 루시스에 오게 된 경위, 눈이 멀게 된 이그니스에 대한 심층적인 묘사 등 굵직한 부분들이 잘려나간 상태에서 이러한 섬세함은 도리어 독이 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나마 프롬프토는 본편에 일반 시민이라는 묘사가 나오거나, 녹티스에게 자신의 컴플렉스를 터놓고 이야기하는 이벤트가 있는 등, BROTHERHOOD를 보지 않은 플레이어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있지만 글라디올러스의 경우 녹티스를 계속 다그치고 화를 내는 묘사 외에는 특별하게 부각되지 않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고 자신의 아버지가 죽고 왕국이 위기에 처했는데도 태평한 것처럼 보이는 주인공과, 그런 주인공에게 짜증을 내는 동료, 그리고 그들이 과거에 어떤 일을 겪고 친해지고 함께 여행을 하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차라리 네 명이 여행 도중 한 번씩 의견충돌을 보이거나 좀더 극적인 사건을 겪었더라면 좀더 이입이 쉬웠을 것이다. 글라디올러스가 녹티스를 다그치는 장면은 있지만 이 장면에서도 녹티스 쪽에서 확실히 자기 생각을 말하지는 않는다. 프롬프토나 이그니스가 중재하고 유야무야 가라앉을 뿐이다. 이렇게까지 철저히 녹티스 본인의 심리묘사를 억제할 이유가 있는지 의문스럽다. 직접적으로 그의 심리를 드러내진 않더라도, 비언어적인 요소를 십분 활용하여 그가 처한 상황과 내몰린 심경을 암시할 수는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결국에는 부족한 배경 묘사가 캐릭터의 표현 실패와도 이어지는 것이다. <세계>를 <구할> <왕>을 묘사해야 하는데, <세계>가 빈약하니 그것을 구하는 <왕>의 당위성도 떨어진다.
주변 인물들은 말할 것도 없다. 루나프레나, 레이브스 같은 캐릭터로 주제를 옮겨가면 그 <되다 만> 서사는 심각한 수준에 이른다. 킹스글레이브를 관람했다면 레이브스가 왜 이제 와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본편만 플레이했다면 애초에 그가 왜 변절했는지조자 알 수 없을 것이다(물론 영화를 관람했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루나프레나는 그저 녹티스에게 반지를 전해주는 비운의 히로인이라는 것 외에는 존재의의가 없는 평면적인 캐릭터가 되었는데, 아무런 고민도 망설임도 없이 정략결혼 상대인 녹티스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며, 태어나서부터 부여받은 사명에 아무 의심없이 목숨을 바치는, 창작자 입장에서는 참 편리하고 고마운 캐릭터이다. 부부는 한 쌍이라고 녹티스 역시 별로 고민하지 않고 크리스탈 속에서 10년을 보내지만, 적어도 마지막에 괴롭다는 한 마디는 하는데 말이다.
이돌라는 제국의 황제에 걸맞은 위엄다운 위엄은 한 번도 보여주지 못한 채 시해가 되어 사라지는 것이 전부이고, 탤콧은 할아버지가 충격적인 죽음을 맞았는데도 다음 챕터로 넘어가면 그 사실을 전부 잊은 것처럼 행동하는데다 10년 후에는 어떻게 알고 감옥에서 막 탈출한 녹티스 앞에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나타나 준다. 아이리스는 정혼자가 있는 녹티스에게 은근한 호감을 표시하면서, 탤콧과 마찬가지로 제러드의 죽음을 겪었으면서 다음 챕터에서 까맣게 잊은 것처럼 행동하며 플레이어를 당황하게 만든다.
나름대로 이름과 자기 서사를 부여받아야 할 조연들이 이 모양이니 NPC에 대해서는 더 언급할 것도 없을 것이다. 대화 내용은 물론, 그들이 주는 서브퀘스트도 매번 똑같거나 비슷비슷한 내용의 오브젝트 탐색과 배달, 몹 사냥의 반복이라 지루하다. 풍부한 서브퀘스트가 장점이 될 수 있는 것은 메인스트림이나 게임 클리어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퀘스트를 통해 조연 NPC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발견하고 게임의 세계관을 좀더 생동감있게 이해할 수 있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야리코미이니만큼 노가다 요소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질보다 양, 퀘스트를 위한 퀘스트만 의미없이 반복된다면, 공연히 도움도 안 되는 부록 요소를 많이 집어넣어서 트로피를 미끼로 유저를 고생시키며 쓸데없이 볼륨만 늘리기보다는 메인스토리와 필수퀘스트를 보강했어야 했다.
타바타 디렉터가 짜임이 허술해도 필요한 부분의 연출은 확실해서 특정 장면에서 플레이어들의 감동을 이끌어내는 데 능하다는 평가를 듣는다는 점에서 FF15의 완성도는 의문스럽다. 나쁘지 않은 소재와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캐릭터로 더 풍부하고 깊이있게 만들 수 있는 여지가 보이기에 아쉬울 따름이다. 시간에 쫓겨 만든 것 같다는 평을 많이 듣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앞서 언급한 반복적이고 볼륨만 차지하는 서브퀘스트와, 스토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인데도 생각없이 집어넣은 티가 역력한 몇몇 안일한 설정들, 국지적인 것에만 신경쓰고 큰 흐름을 소홀히 하는 기획력은 변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런 치명적인 단점에도 불구하고 FF15를 플레이한 뒤 여운이 남고 자꾸만 미련에 뒤돌아보게 되는 것은 분명히 이 게임이 가진 매력이다. 낮과 밤의 얼굴이 다른 세계, 검과 마법과 첨단 문명이 공존하는 매혹적인 왕국에서, 자신의 운명도 모른 채 묵묵히 희생을 향해 나아가는 왕과 그 수행원들이 울고 웃고 역경을 헤쳐나가며 함께 <여행>한다. 어찌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까글주의... 전 프롬이를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