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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FF7

FINAL FANTASY Ⅶ REMAKE: 전설의 재창조

 

FF7 리메이크가 나왔다. 분할작으로. 그 첫 번째 작품이 2015년 E3에서 발표된 후 약 5년만인 2020년 4월 10일에 발매되었다. 나는 게임을 2회차까지 클리어한 후 이 포스트를 쓰고 있다.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FF7 리메이크의 출시는 팬들의 오랜 농담거리였고, 스퀘어 에닉스가 파산 위기를 맞이했을 때 쓰일 비장의 카드라는 말도 심심찮게 오르내렸다. 반은 맞는 말인 듯하다. COVID-19의 영향으로 실내에서 즐길 수 있는 콘솔게임 등의 수요가 늘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FF7R에 대한 반향은 크다. 출시 3일만에 35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하고, 리메이크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출시 첫 한 달 판매량에서 FF 시리즈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또한 4월에 출시된 게임임에도 연내 PS4 타이틀 판매량에서 1위를 기록하였으며, 1년간의 콘솔 독점으로 황혼기에 접어들었던 PS4 기기의 판매량도 끌어올렸다는 평가다.

이는 한편으로는 뒷맛이 씁쓸한 결과이기도 하다. 스퀘어 에닉스의 최근 FF 넘버링 타이틀인 FF15는 사실상 실패라는 성적표를 받았다. FF15 프로젝트는 벌린 판을 다 수습하지 못하고 개발중이던 컨텐츠를 중도 폐기했으며 그로 인해 막대한 손실이 발생했다. 그런 상황에서 과거의 영광을 등에 업은 리메이크작이 오래된 팬들의 향수를 담보로 흥행에 성공한 것이다. 90년대를 풍미했던 작품들의 리바이벌, 리메이크 열풍은 요즈음 일본의 서브컬처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지만, 늘 새롭고 혁신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FF>의 모토에 비추어보면 자존심 상하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FF7R의 디렉터인 노무라 테츠야는 <자신은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기에 FF7의 리메이크 제작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한 바 있으나 이는 번복되었다. FF7R이 회사를 도산 위기에서 구해줄 만능 열쇠라는 농담은 FF7이 보증된 흥행수표라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전제에서 기인하였다. 그리고 스퀘어 에닉스는 그 수표를 썼다. 세피로스는 추억으로 남지 않고 새롭게 편곡된 <편익의 천사>와 함께 팬들에게 돌아왔다. 제작진은 추억에 진 것일까. 게임을 하면서 그 질문에 대해 답을 내놓으려 하는 제작진의 고민을 엿볼 수 있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간에.

 

===이하 스포일러===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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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등에서 여러 제작진이 FF7 원작에 대한 존중을 중시하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집어넣었다고 몇번이나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을 가장 단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음악이다. 나는 발매 전 공개된 데모판을 플레이하며 새로 어레인지된 <오프닝~폭파 미션>과 익숙한 마황로 배경음악, 배틀 테마가 심리스로 전환되는 연출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게임의 중요한 장면에서는 익숙한 멜로디를 새롭게 편곡하고 어떤 장면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음악이 들어가며, 원래라면 미드갈에서 듣지 못했을 음악이 미리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엔딩까지 가면 FF7 음악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작곡가인 우에마츠 노부오가 새로 작곡한 테마곡 <Hollow>를 들을 수 있다.

FF7R의 음악은 게임을 리뷰한 어떤 매체에서도 모두 좋은 점수를 주었다. 나 역시 좋아하는 곡들이 새로 만들어지는 것을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새로 작곡된 테마곡들도 좋았고, 배틀이나 상황의 고조에 따라 곡의 어레인지가 바뀌는 연출은 현대 게임의 기술 발전을 실감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신라 빌딩 계단을 오르면서 일행들이 지쳐감에 따라 BGM의 편곡이 점점 늘어지는 부분 같은 것은 그 장면의 웃음을 선사하는 백미였다. 일부 장면에서 BGM이 튀고 이질적으로 들린다는 지적도 있지만 나는 둔감한 편이라 크게 어색함은 느끼지 못했다. 다만 미드갈 부분을 지나치게 늘리느라 볼륨에 비해 쓸 수 있는 원작의 곡 레퍼토리가 한정되어 있어 한 가지 곡의 어레인지 버전이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여러 개 들어가는데, 미드갈 부분으로만 게임을 만든다는 것이 소화해야 하는 양이 적어서 편해 보이지만 실은 그렇기 때문에 힘든 작업이기도 하다는 것은 OST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볼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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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리메이크의 첫 번째 작품의 스토리를 미드갈까지만으로 제한한 이유를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FF7R 얼티매니아 오메가에 수록된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첫 작품에서는 기본적인 캐릭터 조형, 배틀과 성장 트리 등의 시스템을 구축하고 전체적인 얼개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많은 내용을 넣기 힘들다. 게임의 가장 핵심이 되는 장소이며 FF7의 배경인 가이아의 수도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니만큼 더욱 섬세하게 묘사하고자 하는 제작진의 욕심도 있었을 것이다. 각종 기사, 인터뷰, 공식 유투브 채널 등 가능한 모든 매체를 통해 제작진은 미드갈을 기존의 몇 배로 확장했으며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볼륨이라고 해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의 약 5시간 분량의 에피소드를 20시간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쉽지 않다. 리메이크는 그 분량을 채우기 위해 기존에 없었던 아바란치 멤버들과의 교류나, 외전 소설에 등장하는 오리지널 캐릭터와의 에피소드, 그리고 파티 멤버들과의 상호작용을 더욱 깊이 있게 다루었다. 좋지 않은 시도도 있다. 미드갈은 유저들이 기억하는 것보다 더욱 넓고 방대해졌는데, 더욱 복잡해진 지도를 더욱 현장감 있는 그래픽으로 묘사하여 길치 유저들의 플레이타임은 몇 곱절로 늘어났으며, 길치가 아닌 유저들에게도 게임 진행의 구성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같은 곳을 빙빙 돌게 하여 최소 플레이타임을 확보했다. 풍부해진 서사에 마냥 만족하기에는 이러한 부분은 아쉽다. 다만 나에게는 장점을 상쇄할 정도로 거슬리지는 않았다. 원작의 스무스했던 흐름이 끊긴다고 답답해하기에 앞서 제시에게 제대로 된 성(姓)과 가족이 생겼다는 것에, 웨지가 고양이를 키운다는 것에, 빅스가 고아원의 고아들을 돌봐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에 만족했고 그걸로 좋았다. 누군가는 불만을 느끼고 지적하리라는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팬이고 객관적이지 못하다. 같은 곳을 계속 왔다갔다하며 퍼즐을 풀고 끝나지 않는 사다리 지옥에 갇힌다 한들 옆에서 에어리스가 계속 말을 걸어주고 하이파이브를 해준다는데 감히 불만 운운하다니 배가 불렀다고 생각한다는 소리다. 그리고 파판 지도는 원래 그렇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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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진 인터뷰에서는 <리메이크>를 새로운 FF 넘버링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제작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제작사 내부에서는, FF 넘버링은 기존의 FF의 장점을 답습하면서도 새로워야 한다는 신념이 있다. FF7이 현대의 플레이어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일신한 것은 그래픽뿐만이 아니다. 최근의 RPG의 주류는 실시간 액션 배틀 시스템이고 최근작인 FF15도 액션으로 만들어졌기에 FF7R의 전투도 액션 게임으로 새롭게 만들어지리라는 추측이 대세였다. 그러나 FF7의 원작이 턴제 게임이니만큼 이를 무시하고 리메이크하는 것도 어색하다. 제작진이 내놓은 답은, 액션 게임과 FF의 턴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시도였다. 평가를 보면 호불호는 상당히 갈리고, 최근작인 FF15와의 비교도 심심찮게 보인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자면 FF15와의 비교는 적절치 못하다. 7R은 하이브리드 턴제이며 15는 전형적인 실시간 ARPG이다. 완전히 다르다. 7R과 15를 단순비교한다는 것은 그 두 게임의(주로 7R의) 전투 시스템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7R의 시스템에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 중 하나가 그 '이해하기 어려움'에서 나온다. 무늬는 액션인데 회피도, 회복도 마음대로 못 하고, 턴제라고 생각했더니 ATB 게이지를 채우기 위해서는 액션과 같은 타격이 필요하고 가드할 수 없는 공격은 이동하며 회피를 해야 한다. 액션 게임의 소양과 턴제 게임의 소양이 모두 필요하다. 보스마다 기믹과 파훼법이 다르고 같은 보스도 페이즈마다 약점과 공략법이 바뀌는 등 고도의 전략성이 요구된다. 단순히 액션이나 턴제 등 전투 시스템의 호불호 수준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불호가 생긴다. 한편 전투를 신경쓰지 않고 스토리를 즐길 수 있도록 준비된 이지 모드는 너무 쉽다는 평이다. 노말은 너무 어렵고 이지나 클래식은 너무 쉽다는 말이 나온다. 이 여론은 파트2가 나올 때쯤에는 어느 정도 진정될 것이다. 제작사도 새로운 전투 시스템을 도입한 첫 작품에 대한 피드백을 눈여겨보고 밸런스를 조정할 것이고, 유저들도 시스템에 익숙해지면서 제작사가 의도한 대로 배틀의 재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시스템 자체의 평가는 게이머의 적성, 실력, 취향에 따라 개인의 편차가 크기 때문에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밸런스 조정은 섬세하다고 생각한다. 기믹을 알고 공략하면 쉽고, 고전하더라도 레벨링과 리미트기로 어떻게든 강행돌파할 수 있게 짜여 있으며, 게임오버하더라도 즉시 배틀 직전에서 다시 시작해 재도전할 수 있게 되어 있어 친절하다.

 

신규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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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도 얘기했지만 FF7R에서는 본편에는 나오지 않았던 오리지널 캐릭터가 등장하여 늘어나야만 하는 분량을 어느 정도 소화한다. 거기까지는 좋다. 그러면 그 내용은 어떨까.

 

(이하 외전소설 스포일러)

우선 레즐리와 키리에, 미레이유가 있다. 이 캐릭터들은 2011년에 출간된 외전 소설 <The kids are alright: A Turks Side Story>에 등장한다. 레즐리와 키리에는 소설의 주인공인 에반의 친구들이며, 미레이유는 키리에의 조모이다. 소설은 본편의 2년 후를 다루고 있는데 이 시점에서는 미레이유는 사망한 후이고 레즐리와 키리에는 에반의 든든한 조력자로 등장하지만, 본편에서는 다르다. 미레이유는 아직 슬럼 앤젤로서 현역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레즐리와 키리에는 에반을 만나 손을 씻기 전으로 각각 돈 코르네오의 부하와 소매치기 일을 하고 있다. 슬럼 앤젤은 정의의 괴도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레즐리와 키리에의 경우 클라우드 일행에게 도움이 되는 퀘스트를 주긴 하지만 어느 쪽이냐 하면 엄연한 악인이다. 나는 소설을 읽었기 때문에 반가워했지만 읽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모르는 캐릭터, 그것도 돈 코르네오의 부하와 소매치기 여자애를 돕는 퀘스트가 있고 특히 전자가 신라 빌딩 잠입을 위해 필수적인 퀘스트라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다는 평이 많았던 것 같다. 코르네오의 부하의 개인적인 복수를 도와야 한다는 사실에 의문을 느끼는 유저도 많았고 레즐리의 외모에서 녹티스가 연상되어서인지 레즐리의 연인이 죽었다는 오해도 많이 샀다. 한편 키리에의 퀘스트는 필수는 아니지만 스토리 진행중 필수로 봐야 하는 컷신이 있으며, 서브퀘스트 중 2개와 연관이 있다. 키리에 역시 좋은 인상을 얻지는 못했던 모양으로 신라의 거짓 뉴스를 앞장서서 퍼트리고 주민들에게 정보료를 갈취하거나, 에어리스 납치 후 5번가 교회에 멋대로 들어와서 눌러앉아 있거나, 훔친 물건을 바로 돌려주지 않고 도리어 대가를 요구하는 등의 모습이 한몫했던 것 같다.

이러한 나쁜 인상이 의도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소설을 읽어본 유저들은 이 캐릭터들이 에반을 만나 2년 후에 어떻게 변했는지, 어떤 읽을 겪는지 알고 있다. 키리에가 죠니의 지갑을 훔친 이유는 죠니가 그녀에게 '집적거렸기' 때문에 소매치기의 타겟으로 낙점당한 것이고, 에어리스 납치 후 그녀가 5번가 교회에 있었던 이유는 7번가 플레이트 사고로 희생된 사람들에게 바칠 꽃을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 방문했기 때문이라는 뒷사정도 알 수 있다. 레즐리가 티파의 조언을 듣고 연인을 찾아보겠다고 결심하는 장면이 본편에 나오는데, 2년 후에는 정말로 그녀를 되찾아 함께 살고 있다는 것도 소설에 나오기 때문에 오해의 여지가 없다. 키리에에 비해서 레즐리의 비중이 적긴 하지만 그가 코르네오의 부하 노릇을 했던 것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관계 청산을 위해 오랫동안 대가를 치러야 했다는 사실도 암시된다. 이 소설은 FF7R의 시나리오 라이터인 노지마 카즈시게가 직접 쓴 것인데, 게임에서는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캐릭터를 알려줄 수 있게 한다는 목적에 충실하게 묘사되었지만, 그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소설을 읽게 하는 정도의 호감을 주는 데에는 실패한 것 같다. 다만 이것 자체가 의도되었을 수는 있다. 얼티매니아에 실린 인터뷰를 보면 결의 이벤트에서 에어리스가 클라우드에게 말하는 "좋아하지 말아줘"라는 대사도 이후 에어리스에게 일어날 일을 모르면 자칫 나쁜 인상을 줄 수 있지만, 그 점이 재미있어서 내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넣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키리에와 레즐리 역시 비슷한 의도로 연출된 것으로 짐작할 수도 있다. 원작과 관련 컨텐츠를 접하지 않은 사람에게 나쁜 인상을 먼저 심는 것이 게임 시나리오 연출상 좋은 선택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지만, 아직 후속작이 있으니 조금 더 지켜볼 여지는 있을 것이다. 키리에는 소설의 묘사로 미루어 미드갈을 떠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레즐리는 연인을 찾아 각지를 돌아다니고 있을 테니 또 어딘가에서 마주칠지도 모른다. 본편 후반에 미드갈로 돌아갔을 때에 키리에도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고 말이다.

 

외전 소설 캐릭터들에게 이미 애정이 있다보니 변호하는 투의 글을 쓰느라 길게 적었는데, FF7R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일부 신규 캐릭터들에 대해서도 감상을 남겨본다.

우선 로체는 비교적 일찍 소개된 중간보스 캐릭터이며 외모에서 영식의 킹이나 15의 글라디올러스를 떠올리게 한다. 성우도 글라디오와 같은 미야케 켄타이다. 트레일러에서 바이크를 탄 모습을 보고 미드갈 탈출 장면에 등장하고 파트 1의 최종보스로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닐까 개인적으로 추측했었는데,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니었던 모양인지 제작진의 의도보다 주목도가 높았던 듯하다. 결국 노무라 테츠야는 인터뷰를 통해 그는 단지 티파가 세들어 사는 아파트의 집주인이나 제시의 부모님같은 많은 오리지널 캐릭터들 중 한 명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여전히 당초 기획대로 파트 1에서 세피로스와 싸우지 않는 전개였다면 최종보스가 정말로 로체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든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현재의 그의 비중이 애매하고, 있거나 말거나인 지나가는 중간보스 캐릭터인데도 지나치게 그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연출이 많고 작중에 여러 번 등장할 듯한 뉘앙스를 주기 때문이다. 파트 2를 위한 안배일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는 파트 1의 최종보스라는 자리를 세피로스에게 빼앗긴 흔적이 아닐까. 그냥 단역이라기에는 캐릭터 디자인이며 성우며 3rd 클래스 솔저라는 설정, 클라우드 일행을 대하는 태도 등이 지나치다는 인상이다.

한편 가장 많은 오리지널 캐릭터가 나오는 장소는 챕터 9에서 방문할 수 있는 월 마켓이다. 유명한 클라우드의 여장 이벤트를 새롭게 리뉴얼하면서 새로운 캐릭터와 에피소드가 대거 들어갔는데, 오리지널 캐릭터에 대해 얘기하기에 앞서 챕터 9에 관한 감상을 먼저 적어보자면, 23년 전 게임을 2020년에 새롭게 만들며 제작진이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 여실히 드러내는 포인트였다. 공동 디렉터인 토리야마 모토무가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원작의 월 마켓이나 꿀벌관의 묘사는 현대에 도저히 그대로 리메이크할 수 없을 정도의 수위이며 똑같이 만들었다가는 특정 국가의 심의 기준에 따라서는 15세 이상 등급을 받지 못할지도 모르는 내용이었다. 당시의 그래픽 수준이 사실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얼버무릴 수 있었지만 스크립트에는 성매매 업소에 대한 간접적인 묘사나 범죄조직에 의한 성상납을 암시하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모두 삭제하면 이후 스토리와 앞뒤가 이어지지 않게 되고 많은 플레이어들이 리메이크에서 보기를 기대하는 장면도 넣을 수 없게 되며, 너무 많은 변형이 들어가면 <리메이크>라고 말하기 어렵게 된다. 꿀벌관의 표현 수위를 상당히 낮추고, 크로스드레서에 대한 혐오 표현이 될 수 있는 내용을 삭제했다는 점에서 제작진도 이런 문제를 인식은 한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꿀벌관은 유흥업소로 남아있으며, 꿀벌관에서 생략된 성적인 암시는 대신 마담 맘이 운영하는 손마사지 업소에서 표현되었다. 마사지업을 빙자한 퇴폐업소가 실제로 버젓이 운영되어 직업 마사지사나 사실을 모르고 방문하는 고객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입히는 피해를 생각하면 이러한 묘사를 "섹시한 장면"이라고 표현하며 별다른 고려 없이 넣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월 마켓>의 설정 자체가 신라의 묵인하에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인 일들이 자행되는 장소라는 전제는 있지만, 그럴수록 제작자의 문제의식이 뚜렷해야 불편한 묘사가 되지 않는다. 어디가 어떻게 문제인지 모르면 '원래 그런 곳이라는 설정이다'라고 뭉뚱그리는 말은 변명이 되지 못한다. 내 입장에서 9챕터를 참고 넘길 수 있었던 이유는 스토리에서 주로 성적 암시의 대상이 되는 캐릭터가 남성 캐릭터인 클라우드였기 때문이고, 제작진의 말마따나 표현 수위가 위험 수위를 간신히 넘지 않을 만큼만 '아슬아슬'했기 때문이다. 다만 원작의 팬으로서는 '샘 루트'의 서브퀘스트에서 원작의 여장 퀘스트를 하나의 퀘스트로 통합, 변형해서 원작의 오마쥬를 하면서도 오히려 원작보다 성인지감수성이 떨어지는 내용으로 바꾼 것이 매우 불만스럽다. 에어리스가 드레스를 갈아입는 것은 생면부지의 티파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잠입을 준비하는 장면인데, 그 동안 월마켓에서 좀 놀고 오라며 남자끼리의 공감대를 운운하는 샘의 대사는 유저 입장에서 당황스럽고 불쾌했다. '마담 맘 루트'에서는 슬럼 앤젤에 대한 단서가 나오며 슬럼 앤젤에 관련된 다른 서브 퀘스트와도 내용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전개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도 비교된다. 트로피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클리어했지만 다시는 샘 루트를 플레이하지 않을 것이다.

캐릭터들 이야기로 넘어가면, 아니양, 마담 맘, 샘 세 명이 돈 코르네오의 하수인으로 나와서 월 마켓의 바뀐 스토리 전개의 주역으로 활약하는데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셋의 캐릭터성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마담 맘의 묘사를 보면 돈의 제멋대로인 부분과 그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불만이 상당히 쌓여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돈을 위해 일하고 클라우드와 에어리스의 목적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으면서도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긴 했지만 결국 협력하는 이유가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설정이었다. 아니양과 지난 형제는 자칫 JRPG에서 묘사되는 소위 '오카마' 캐릭터의 퀴어혐오적 요소를 답습할 위험이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불편하지 않은 선에서 잘 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샘 역시, 샘 루트의 내용 때문에 개인적으로 점수가 깎이긴 했지만 7번가 플레이트 붕괴 후의 초코보를 아끼는 묘사나 언뜻 드러나는 마담 맘과의 미묘한 관계 등이 표현되어 입체적인 조연 캐릭터 서사를 풀어낸 것은 훌륭했다고 보고 있다.

 

기존 캐릭터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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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어진 미드갈에서 오리지널 단역 캐릭터들도 나름대로 충실한 서사를 보장받았으니, 기존의 주역 캐릭터들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발매 전 인터뷰에서 몇 번이나 강조했듯이 주인공 클라우드의 묘사는 23년 전 하지 못했던 세밀한 연출을 파고들며 표정, 대사, 몸의 작은 움직임, 성우가 연기하는 말투 하나하나까지 공을 들였다. 23년간 FF7을 잘 모르던 사람들에게 굳어진 <쿨한>, <냉정한> 이미지, "흥미 없어"라는 대사로 대표되는 클라우드의 캐릭터상을 FF7R은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그는 정신적으로 어리고 미숙하며 인간관계에 서툴다. 어떤 사고로 PTSD를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자주 환각을 보고 두통을 호소한다. 육체적으로는 완성된 솔저의 몸이고, 전투에 있어서는 프로지만 우스꽝스러운 허세를 부리고 자주 놀림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흥미 없어"는 정말로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위기감의 표현이 된다. 잘 모르는 것, 자신이 구축한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 곤란한 상황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말인 것이다. 게임이 진행되고 바렛, 티파, 에어리스와 부딪치고 상호작용하면서 클라우드는 변한다. 원작에서는 극초반이고 일부에 불과했지만 리메이크에서는 더 많은 일을 겪고 원작보다 조금 더 많이 성장하는 것이다.

이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렛과의 관계일 것이다. 일번 마황로 폭파 작전에서, 원작과 비슷하게 클라우드와 바렛은 사사건건 충돌한다. 둘의 티키타카는 다채롭고 유머러스하고 맛깔나기까지 한다. 바렛은 계속 신라 소속이었고 의뢰받은 일을 썩 내켜하지 않는 클라우드를 조롱하며 시비를 걸고 클라우드는 질세라 그를 비꼰다. 워낙에도 과격했던 원작 바렛의 대사는 더빙되자마자 유저들로부터 <시끄럽다>라는 원성을 들었다. 하지만 그 대신일까, 리메이크의 바렛은 원작보다 멋있어졌다. 제작진은 아바란치의 멤버들이 바렛을 서포트해주는 것이라고 했지만 원작보다 리더로서의 카리스마가 강조되는 장면도 있으며, 선글라스를 낀 모습도 폼난다. 한편 선글라스를 벗으면 사람 좋은 서글서글한 눈매가 드러나고, 딸인 마린을 지극히 아끼는 모습도 원작보다 더욱 세심하게 표현되었으며 앞뒤 생각없이 돌진하는 다혈질적인 면은 남아있지만 원작보다는 좀더 주변 상황을 살피고 자제력을 갖추게 되었다.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클라우드를 점점 좋게 보게 되며 관계를 쌓아나가는 장면은 클라우드뿐 아니라 바렛의 성장 역시 볼 수 있어 흥미롭다.

클라우드가 처음으로 보수만을 위해 움직이는 무관심한 태도에서 벗어나 동료들을 진심으로 돕기로 결심한 계기는 소꿉친구인 티파일 것이다. 티파가 위기에 처했을 때 도우러 가겠다는 7년 전 급수탑의 약속을 클라우드는 플레이트 위에서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보며 스스로 떠올려낸다. 그 말을 들은 티파는 '어릴 때에는 이런 식의 위기는 상상하지 못했다'라고 실토한다. 7년이 지나 티파는 현실과 부딪치며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었고, 클라우드는 어떤 부분은 너무 달라졌고, 어떤 부분은 전혀 성장하지 못했다. 클라우드에게 슬럼에서의 생활에 대해 하나하나 알려주고 해결사 일을 해나가기 위해 갖춰야 할 요령을 가르치고 친구 사이에도 돈 계산을 빠릿하게 챙기는 모습은, 실제로는 연하임에도 불구하고 클라우드보다 티파를 훨씬 어른스럽게 보이게 한다. 클라우드의 변모를 보면서도 불안과 혼란을 능숙하게 감추고, 아바란치의 무장 노선에는 적극적으로 찬동하지 못하는 다정한 성정이지만 동료들을 누구보다 아끼고 지켜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약하면서도 강한 모습이 플레이어를 사로잡는다.

반면, 에어리스는 그런 티파와는 여러 면에서 대조되는 모습을 보인다. 티파가 외강내유라면, 에어리스는 외유내강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에어리스는 <슬럼에 핀 꽃>이라는 수식어가 말해주는 것처럼 연약하지만 강인하고, 비밀을 감추고 있다. 노지마 카즈시게는 FF7R 발매 전 발매된 <FF7 월드 프리뷰>에 에어리스와 관련된 소설을 게재했다. 에어리스의 과거 이야기를 다루는 이 소설은, 리메이크에서 추가된 11챕터 열차 무덤 에피소드와, 17챕터에서 갈 수 있는 신라빌딩의 어느 장소와 관련된 백스토리를 제공하며 에어리스의 서사에 더욱 안타까움과 감동을 더한다. 원작에서도 에어리스는 등장은 짧지만 확고한 캐릭터성과 서사로 게임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리메이크에서의 에어리스는 아무래도 거기에 그치지 않을 듯하다. FF7R의 주제곡인 <Hollow>의 가사는 클라우드가 에어리스를 생각하는 노랫말이라는 것이 중론이며, 아직 유저가 모르는 FF7 리메이크의 새로운 서사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도 에어리스다. 두말할 것도 없이, 리메이크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캐릭터를 한 명만 꼽으라면 에어리스일 것이다.

 

주연 캐릭터를 제외하고 이번 FF7R로 가장 큰 수혜를 받은 캐릭터라고 하면 역시 아바란치의 세 명, 빅스, 웨지, 제시일 것이다. 제시는 클라우드와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원없이 뽐냈고, 골드 소서의 배우 지망생이었으며 아버지가 신라를 위해 일하다가 마황 중독에 걸렸다는 백스토리가 생겼다. 클라우드의 말마따나 아바란치에게 별의 생명 얘기만 하는 것보다 좀더 "알기 쉬운 이유"를 제공하는 것이다. 또 티파와의 관계도 흥미로운데,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서 과격한 행동도 불사하고 목숨을 잃을 각오도 되어 있는 제시에게 있어 소극적인 티파는 못 미더웠을 것이다. 하지만 7번가 기둥에서 부상을 당한 제시를 위해 울어준 것은 결국 티파였다.

웨지는 아바란치 멤버 중 유일하게 클라우드에게 동생처럼 구는 캐릭터로, 원작의 먹을 것을 좋아한다는 캐릭터성을 살리면서 클라우드를 형님이라 부르며 잘 따르고, 고양이를 좋아하며 노력파라는 설정을 넣어서 귀여운 인상을 더했다. 한편 웨지는 최초로 FF7R의 <원작과 확연하게 달라지는 부분>을 보여주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7번가 플레이트에서 살아남아 신라 빌딩에 잠입한 클라우드 일행을 돕고, 리메이크에서 부각되는 아바란치 '본가'와 관련성을 제공하기도 한다. 결국 운명의 파수꾼인 필러가 웨지의 생사를 결정하기 위해 개입할 만큼 그의 활약은 훌륭했다.

빅스는, 다른 두 사람에 비해 추가된 서사도 적고 비교적 원작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리메이크 엔딩 장면에서 리프 하우스에서 눈을 뜸으로써 플레이어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빅스가 리프 하우스의 고아들을 돌보는 선생이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데, 컴필레이션을 포함한 FF7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어린이가 미래이며 희망이라는 메세지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리메이크에서도 클라우드가 어른 NPC와 부딪히면 그대로 밀치고 지나가지만 어린이 NPC와 마주치면 한 발 물러나 비켜주거나, 해결사 일 중 어린이를 돕는 퀘스트의 비중이 높은 등 디테일한 부분에서 비슷한 태도를 유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시와 웨지는 원작대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어린아이와 관련있는 서사를 가진 빅스의 생존이 파트 2 이후로 어떤 역할을 할지 주목해볼 만하다.

 

스토리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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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7R 파트 2 이후는 어떻게 전개될까, 팬으로서는 기대와 두려움이 아닐 수 없다. 원작의 탄탄한 스토리가 있는 작품을 리메이크한 작품에 어째서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것인가. 이것은 리메이크인가, 리부트인가.

18챕터를 플레이하고 엔딩을 보고 난 후 이 부분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고 고민도 했지만 정리가 되지 않았다. 파트 2가 언제,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지금 상황에서 정리가 될 턱도 없다. 팬들의 반응은 분분하고, 발매 후 얼티매니아의 제작진 인터뷰에서는 아직 리메이크가 몇 분할인지도 확실히 정해놓지 않았다고 한다. 큰 그림은 있지만 아직 알려줄 수 없단다. 하지만 마냥 느긋하게 파트 2를 기다리기에는 18챕터의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원작의 스토리대로 운명을 이끌려고 하는 존재는 필러(Whisper)라고 불리며 클라우드 일행이 물리쳐야 할 대상이 되었다. 팬들은 리메이크가 원작과 같은 스토리라인을 따라갈 것이라는 사실에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는데 그런 당연한 믿음이 깨지면서 이 스토리에서는 원작이 지켜지기를 바라는 팬인 자신이 물리쳐야 할 적인가, 라는 의심마저 품게 된다. 17챕터까지 원작 FF7을 하나하나 존중하며 살을 붙인 부분들이 많았던 만큼 운명 - 추측하기로는 원작의 스토리 - 을 따라가지 않겠다는 선언은 더 당혹스럽게 다가온다. 설마 다른 작품도 아닌 FF7의 리메이크에서 그럴까 싶지만 이미 빅스가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원작과는 노선이 달라진다는 의미이고, 나나키가 AC의 첫 부분을 두고 "버리고자 하는 미래"라고 언급하는 장면이나 스탭롤 후의 <Unkown Journey>라는 문구가 그런 의심을 더욱 부추긴다. 리부트이면 리부트라고 할 것이지 이런 귀찮은 방법으로 리메이크인 척하는 리부트를 만들 필요가 있나? 엔딩을 보고 몇 주간 기만당한 기분에 시달려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지, 제작진도 그런 반응을 우려하고 있었던 것 같다. 디렉터 노무라 테츠야는 게임 출시 3주 후에 나온 얼티매니아 오메가의 인터뷰에서 리메이크는 디테일은 바뀔지언정 원작의 스토리라인을 따라갈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시나리오 라이터인 노지마 카즈시게는 FF7R의 스토리를 컴필레이션을 포함한 FF7의 세계관을 집대성하는 이야기로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FF7R의 스토리가 제대로 AC와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 대목이다. 우선은 안심할 수 있긴 하지만, 파트 1의 내용을 어떻게 다시 원작대로 이어나갈지, 이후 무슨 일이 더 일어날 것인지 의문은 커질 뿐이다.

이후 원작대로 스토리가 전개된다고 해도 내가 생각하는 문제는 남아있다. 그 중 하나는 세피로스를 너무 성급하게 등장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은 클라우드가 보는 환각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유저 입장에서 보면 세피로스는 너무 자주, 많이 등장한다. 앞서 말했지만 FF7R은 미드갈 파트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스토리 밀도는 낮은 편이다. 그런데 세피로스는 등장 장면 하나하나의 임팩트가 크고, 그냥 나오지 않고 예고도 없이 튀어나와 사람을 놀라게 하며, 나올 때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의미심장한 대사를 늘어놓는다. 그를 보는 클라우드의 반응도 격하다. 장면의 밀도가 높단 말이다. 인상에 강하게 남을 수밖에 없다. FF7R의 스토리 밀도가 낮은 것과 맞물리니 실제 등장보다 더 분량이 많은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사실 FF7 원작도, 7R도 평범하게 플레이했을 때의 플레이타임은 약 30시간 전후로 비슷하며 둘 다 세피로스(정확히는 세피로스의 환각도 포함한다)는 비슷한 빈도로 등장한다. 그러나 원작은 스토리의 밀도가 훨씬 높기 때문에 세피로스가 '자주' 나온다는 인상을 덜 받는다. 전세계를 여행하면서 세피로스가 18번 나오는 것과, 미드갈에서만 18번 나오는 것의 차이다.

세피로스에 관련된 문제는 하나가 아니다. 에어리스와 마찬가지로 스토리의 열쇠를 쥐고 있으며 정확하게 대척점을 이루고 있는 것이 세피로스인데, 리메이크의 세피로스, 특히 18챕터의 세피로스는 팬들이 알고 있는 세피로스가 아닌 것 같다. 에어리스 역시 원작대로의 에어리스라기에는 어딘지 위화감을 주고 있기는 하지만 세피로스는 그런 부분이 여과없이 표현된다. 물론 이 시점에서는 실제의 세피로스는 대공동에 잠들어 있으므로 18챕터에 등장한 것이 진짜 세피로스가 아닐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만 유저 입장에서는 정체가 무엇이든 세피로스의 모습을 한 캐릭터는 어쨌거나 세피로스라고 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그 세피로스는 17챕터까지의 '세피로스'와 명백히 다른 태도와 언행을 보이고, 목적도 팬들이 익히 아는 진짜 세피로스의 목적과는 다른 것처럼 보인다. 세계의 끝이라고 부르는 아공간에서 클라우드에게 손을 잡자고 회유하는 모습은 원작대로라면 그 시점의 세피로스가 절대 할 리가 없는 행동이기 때문에 더욱 위화감이 든다. 그의 정체는 이후에 밝혀지겠지만, 지금은 알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당혹스럽기만 하다. 세피로스x클라우드 동인지라도 내라는 친절인가?

생각해보면 이 부분에 있어서 FF7이 친절하지 않았던 적은 없기는 하다. 에어리스와 티파 모두 동등한 히로인이라던 노무라의 인터뷰를 돌이켜 보면 억울천만이다. 에어리스는 결의 이벤트에서 클라우드한테 나 좋아하지 말라고 시작도 하기 전에 거절하고 닿을 듯 닿지 않는 그대 운운을 연출하고 있을 동안 세피로스는 클라우드를 둘만의 세계로 불러다가 과감하게 손목도 잡고 어깨에 아무렇지 않게 손을 올리고 귓가에 감미롭게 의미심장한 말도 속삭이고 그러고보니 초반부에는 바닥에 넘어뜨리기도 했고 하여간 파죽지세의 행보를 보인다. 6챕터 정도까지는 클라우드에게 남녀노소 불문하고 플래그 꽂는 캐릭터가 너무 많아서 당혹스러운데 후반부가 되니 세피로스가 어느새 그 많던 플래그를 다 부수고 클라우드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어서 당황스럽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다. 원작은 이러지 않았는데... 과하다. 과해도 너무 과하다. 아무튼 원작은 안 이랬다. 나의 원작을 돌려달라. 라떼는 이런 거 안 했는데 요즘 게임은 동인 장사에 눈이 멀어서... 아니다... 그만하자...

후속작이 나오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떡밥과 동인 소재 농담을 빼고 말해도 17챕터까지의 전개와 18챕터 사이의 위화감은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점도 있다. FF7의 미드갈 파트는 사건의 발단, 다른 말로는 '기' 혹은 '서'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이 부분을 가지고 결말을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의 미드갈은 하나의 작은 이야기로서 기승전결을 갖춘 서사로 엮을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다. 실제로 17챕터 이전까지는 이야기가 착실히 진행되어 결말까지 쌓아나간다는 인상도 있었고 말이다. 게임에서는, 신라 빌딩을 올라가다가 호조의 실험실을 헤매면서 그를 만족시킬 때까지 비슷한 구조의 맵을 계속 헤매야 하는 부분부터 이야기 구조가 균형을 잃기 시작한다. 지겹고 의미 없는 행동, 목적도 <호조를 만족시킨다> 정도가 끝이고 실컷 굴림당한 후 호조에게 주먹 한 대라도 날려볼 기회조차 없다. 그런 찜찜한 기분을 안고 옥상에 올라가면 (심의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지만) 원작에 비해 임팩트가 2% 부족하게 느껴지는 신라빌딩 묘사와 기억과는 다른 모습의 제노바가 유저를 맞는다. 실망스럽다. 프레지던트와 바렛의 대화 부분에서 뭔가 건졌다는 느낌을 받을 새도 없이 (또) 세피로스가 직접 왕림해서 프레지던트를 찌르고 바렛도 찌른다. 바렛이 전투에서 이탈한 상태로 (별의 진정한 적이라는) 제노바를 잡으면 필러가 와서 적절히 바렛을 살려준다. 뭐 하자는 건가? 이후는 엉망진창이다. 어렵고 길고 짜증나는 바이크 게임은 그 서막에 해당한다. 스케일은 감당할 수 없이 부풀고 캐릭터들은 영문모를 소리를 자기들끼리 주고받는다. 바렛 정도는 나와 비슷한 입장에 있어줄 거라는 기대도 잠시, 분위기에 휩쓸렸는지 살려준 은혜도 잊고 뭔지는 모르지만 협력하겠다며 필러에게 열심히 총을 갈기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캐릭터들은 유저를 두고 가버렸다. 그나마 원작의 흐름을 지켜주는 필러한테라도 이입하게 된다. 아, 물론 적이지만... 간신히 필러를 잡으면 또 이상한 공간으로 끌려가면서 세피로스가 진 최종보스의 위엄을 뽐내며 등장한다. 슬슬 지겨워진다. 빨리 잡고 <Ahead on our way>를 들으며 엔딩을 보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다(안 나온다). 세피로스까지 잡고 겨우 끝났나 했더니 아직 남았다. 엔딩의 클라우드 vs. 세피로스 1대 1 전투 비슷한 연출이 나오면서 1인칭으로 오레를 쓰는 세피로스가 나와서 클라우드에게 플러팅을 하는 것이다... 미치겠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엔딩 영상을 감상하고 있으면 아까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면서 날 두고 갔던 캐릭터들은 분명 오늘 만난 사이인 것 같은데 다들 내가 모르는 우정을 돈독하게 쌓아서 감동의 피날레를 맞는 중이다. 리메이크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본편 엔딩에서 AC 결말까지 진행된 후에 1863번째 회귀를 했고 그 과정은 나만 모르는 듯한 외로움에 휩싸인다.

요약하면 이야기의 흐름, 구성, 캐릭터들 사이의 감정선이 18챕터, 정확히 말하면 17챕터 후반부터 갑자기 몰아치면서 자기 혼자 엔딩으로 달려간다는 의미다. 넣고 싶은 복선이나 장면을 욱여넣은 흔적은 역력하고 거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설명은 없다. 17챕터 이전까지는 스토리의 밀도는 낮지만 원작의 트랙을 밟아가며 하나하나 쌓아가는 전개였기 때문에 더욱 비교될 수밖에 없다. 사실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고 추측만 무성한 리부트, 회귀, 메타 소재 등에 대한 개인적인 불호는 그렇다 쳐도 이 구성은 명백히 파트 1 게임 진행 자체의 문제이기 때문에 충분히 지금 시점에서도 비판이 가능하다. 파트 1이 좀더 밀도있는 전개였으면 세피로스가 자주 나오더라도 지금처럼 과하다는 느낌은 덜했을 것이고 18챕터가 이렇게까지 붕 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결국 다시 미드갈 분량까지만 포함했다는 사실이 발목을 잡는 것이다. 당초 기획대로 세피로스든, 생각해놓은 스토리 복선이든 많이 보여주겠다고 욕심부리지 말고 암시 정도만 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미 이렇게 나왔고 후속작을 기다리고 있는 시점에서는 어떻게 무를 수도 없는 일이니, 파트 2가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이후의 내용이 파트 1의 단점을 상쇄하고 원작의 내용과 절묘하게 맞물리게 연출된다면 이번 작품에 대한 불만도 자연스럽게 들어갈 테니까.

 

그렇게 많은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을 남겨두고 파트 1이 끝났다. FF7R의 여행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같은 곳을 같은 코스로 여행하지만 23년 전의 풍경과는 분명히 다르다. 제작진은 이 전설적인 작품을 다시 만들면서 <태어나기 전부터 전설>이라는 광고 문구를 썼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것이다. FF7 원작부터가 전설적인 작품이고, 리메이크 역시 또 다른 전설이 될 것이라는 자신감. 그리고 1997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에게 정말로 '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전설이었던 작품이 어떤 것인지 체험하게 해 주겠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으리라 생각한다. FF7 리메이크가, FF7이 시대를 뛰어넘어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작품임을 증명할 수 있는 명작이 되기 바란다. 혹여 아쉬움이 남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FF7의 세계를 한 번 더 새롭게 체험 가능하다는 사실만으로도 나 개인에게는 충분히 멋진 경험이 될 것이라 믿는다. 어떤 <Unknown Journey>가 기다리고 있는지, 부디 끝까지 내 눈으로 지켜볼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