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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음악

블레이드 러너: 파이널 컷

이 영화를 너무 늦게 봤다. 2019년이 오기 전에 봤으면 감상이 전혀 달랐을 텐데 2021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본 감상을 요약하면 <오래된 미래>라는 한 마디가 되겠다.

20세기의 SF가 그리는 가까운 미래상을 좋아한다. 인간은 우주를 마음대로 오가지만 유선전화를 사용하고 오래된 전축으로 음악을 들으며 그들의 첨단 기기는 화면이 볼록한 CRT 모니터로 암호 같은 영단어들을 출력한다. 500년 전의 영국인들은 제국주의를 앞세워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했고 그들의 후손은 헐리우드에서 안드로이드 노예들을 부리며 미지의 우주를 <개척>한다는 내용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 의미가 답습이든 비판이든.
지금 와서 보면 <블레이드 러너>가 그려내는 모든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는 낡았다. 감정을 가진 복제인간의 제조와 그들의 노예화를 다루는 이야기의 주제는 현재의 과학윤리에서 새삼스레 언급할 의미조차 없는 낡은 화두다. 영화 구석구석에서 1980년대 초의 낮은 여성인권이나 급속히 발전하는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서구 사회의 두려움과 무지를 읽을 수 있다.
당연히, 그것은 그것대로 지금에 와서도 의미가 있다. 작중 <로이>가 데커드의 앞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 자신의 진짜 추억 이야기를 하며 숨을 거두는 장면은 SF 영화사에 남을 인상적인 장면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레플리칸트를 죽이는 일을 하지만 결국에는 레플리칸트를 사랑하게 된 주인공 데커드가 마지막에는 자신의 연인이 된 레플리칸트를 선택하는 장면으로 끝난다는 것, 그리고 끝까지 주인공이 레플리칸트가 아니라는 증거를 보여주지 않는 것도 생각의 여지를 주며 의미심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남는 영화이다. 어딘지 어색한 느낌인데, 스릴러에 가까운 <레플리칸트 사냥> 활극의 내용과 레플리칸트의 인간성을 고찰하는 주제의식이 서로 잘 맞물려 들어가지 않고 물과 기름처럼 유리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미래적인 느낌을 위해 넣었을 밤의 네온사인 곳곳에 침투한 일본어는 감독의 오리엔탈리즘의 소산으로 느껴져 몰입을 계속해서 방해했다. 이 영화는 확실히 <시대를 뛰어넘는 명작> 축에는 들지 못한다. <블레이드 러너>의 오래된 미래는 낡은 것으로 남았다. 그래도 젊은 시절의 해리슨 포드를 다시 볼 수 있어 신선했고 주제의식에 가장 맞닿아 있는 <로이>의 캐릭터 빌딩은 수준급이었기에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영화로 본다.

필립 K. 딕의 그 유명한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는 헐리우드에서 어떻게 재해석되어 가는가? 날카로운 원작의 주제의식과 아쉬움이 남는 각색의 1982년작 영화를 넘어 2017년의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어떻게 되었을지 확인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데커드 역에 여전히 해리슨 포드가 캐스팅되었다는 이야기, 원작의 감독 리들리 스콧이 제작진으로서 참여했다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영화가 그렸던 2019년은 전혀 다른 형태로 지나갔지만 낡음이 먼저 있었기에 그 위에 그려지는 또 다른 새로운 미래는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